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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리뷰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by 조창대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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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요 뽀잉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단순 노동은 물론이고, 전문성과 노하우가 필요한 저널리즘 분야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인공지능이 기사를 쓰는 로봇 저널리즘과 알고리즘 저널리즘의 역할도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특히 수치 변동이 핵심이고, 심층적인 분석보다는 단순 사실 나열이 주가 되는 주식, 비트코인, 스포츠 결과 등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다량의 기사를 양산해 내고 있다. 인공지능이 그럴듯하게 잘 짜여진기사를 만들면서 기자가 기사를 쓰는 업무를 돕지만, 실제로 올해 3월 미국 로스엔젤레스(LA)에서 진도 2.7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8분만에 기사 작성과 발행까지 가장 먼저 끝낸 기자는 지진 기사 전문 로봇인 퀘이크봇(Qualkebot)’이었던 만큼, 인공지능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기존 기자들의 역할이 일부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언론에 있어서 중립성과 신뢰성을 요구하는 대중들은 사람이 쓴 기사보다 주관이 들어가지 않은 정확한 팩트를 보도하는 인공지능을 더 신뢰한다는 조사 결과까지 있다.

 

출처: https://hrcopinion.co.kr/archives/11839

반면 인공지능과 비교하여 기자가 쓴 기사의 뉴스 가치는 사람에 대한 이해’, ‘재미’, ‘심층성등으로, 시민 저널리즘이 부상하며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가치들인 공감성이나 인간적 흥미성과 상응한다. 대중은 한 이슈에 대한 기사의 후속보도를 원하고 사안에 대한 원인·결과에 대한 분석을 넘어서 사건 당사자의 개인사와 같은 사적인 정보를 추가한 기승전결이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기사를 보며 공감하기를 원한다. 이에 기자의 역할이 변화될 필요성이 생겨났고 기자들은 로봇 저널리즘으로의 전환과 대중의 달라진 가치 체계와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이 책의 글쓰기 전술이기도 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기존의 ‘non-public affairs’로만 여겨졌던 매우 다양한 주제와 개인의 일화, 사건을 엮어내어 풍부한 논점과 서술로 구현되는 이야기체나 문학적인 글쓰기 전술을 유기적으로 구성한 이야기체 기사나 기획이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방식이 부상하며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데이터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사회문제와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상과 배열, 의미 부여가 기자에게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다. 데이터 분석은 기사의 스토리 라인을 드러내거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노동OTL><위건 부두로 가는 길>

한겨레2120099월부터 게재하기 시작한 <노동OTL>은 네 명의 기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한 달간 일하며 보고, 겪은 일들을 각각 세 편씩의 기사로 연재한 기획 기사이다. 안산의 공단, 마트의 고기판매 매대 등 각각 다른 현장으로 투입하여 그곳의 동료 노동자의 노동 방식과 생활상, 작업환경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를 관찰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기존의 언론은 통계 자료를 분석하며 거기서 파생되는 큼지막한 사회문제를 지적하는 데에 그쳤다면, 내러티브 저널리즘 방식인 심층 르포 혹은 현장탐방기의 형식으로 쓰여진 연작은 체험기와, 노동 현장과 같은 세밀한 사례로 들어가 한명, 한명의 삶을 조명하여 밀도있는 공감을 이끈다.

<노동OTL> 연작과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둘 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형식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위건 부두로> 또한 한겨레21의 기획기사와 동일하게 화자가 노동 현장에 직접 가서 체험하고,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솔직한 어체로 기술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현장감을 준다. 또한, 노동, 빈곤,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은 결코 겪어보지 못할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현실에 체념하고 하루하루를 근근히 생존하는 것만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보여준다. <노동OTL> 에선 임인택 기자가 안산의 공단에 가서 공장 노동자가 되어 겪은 체험기에서 시급 4천원의 노동자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산에서 만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서 일의 보람이나 사회적 자존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다시금 ‘공순이’ ‘공돌이’란 사회적 비하가 유행한대도, 이들은 침묵으로 ‘내면화’할 것이다. 별이 뜬 퇴근길은 그저 피곤하다.

 

일해도 가난한 노동자에게 희망은 오직 돈이다. 나부터도 날품으로 팔려가는 계약서에 서명할 때 ‘170만원’만 눈에 들어왔다. 올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인 132만7천원을 훨씬 웃돌지 않나.

 

임인택 기자는 하루 12시간 노동을 서서 일하며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보증금 200만원에 월 20만원인 자취방에 가서 까무룩 잠에 드는 노동자들의 지친 일상을 그려냈다. 전망 없는 중노동을 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없이 그저 쳇바퀴처럼 고단한 몸을 이끌고 출퇴근하는 노동자의 보람없는 삶은 힘겹기만 하다. 사회에서 철저히 타자화되고 제도적인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빈곤의 문제가 뿌리 박혀 있는 현상을 대변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도 영국 북부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일하는 모습과 일상을 기록했다. 그 당시에 만연했던 광부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려 광부들의 1인당 작업량이나 임금, 작업을 하러 여행을 떠나는 일, 광부들에게 목욕 시설이 절실하다는 사실 등의 진실을 말해준다. 특히 광부들이 작업하러 가는 길을 여행이라고 명명하며 1.5 킬로미터라는 갱도의 길이나 높이의 수치를 자세히 설명하고 갱도를 지나며 잃게 되는 감각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나로 하여금 갱도를 횡단하게 만들었다. 또한, 랭커셔와 요크셔의 탄광촌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직면한 주택 문제나 실업수당을 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조명해서 영국 지자체가 지원해주는 정책은 그들의 주택이나 실업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노동 시장과 보금자리 그 어디에서도 안심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생활보호위원회가 지급하는 실업수당은 실업자들이 노동 시장에 다시 진출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는 대신, 수당을 쪼개 근근히 먹고 살게끔 만들어서 생활비로 지출하게 하며 실업자들이 그들의 인생을 대충 떼우게만들었다. 수당의 4분의 1을 집세로 내고 남은 돈으로 먹고 살려고 하니 사람들은 남은 수당에 맞게 살기 위해 싸구려 통조림 음식을 먹고 성직자의 한심한 강연을 들으며 추위를 피한다. 빈곤과 빈곤을 없애주지 못하는 잘못된 제도의 결합은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 빙글 기어다니게 했다. 지극히 고요하고도 끔찍한 삶이다.

 

리얼리티의 명암

두 텍스트의 이야기체는 현장감을 주고 독자들에게서 빈곤과 노동 문제에 대한 의식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신뢰성과 중립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저널리즘의 관행으로 인해 내러티브 저널리즘과 르포르타주는 객관성의 측면에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발로 뛰는 취재를 강조하며 구체성과 리얼리티를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취재가 기자의 시각사유에 따라서 구성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완벽하게 리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전에는 해본 적 없던, 열약한 노동 현장에서 철저히 타자였던 기자의 경험담과 관찰은 어쨌거나 한 명의 인간의 시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날 것의 리얼리티를 담았다고 할 수 없다. 기존의 스트레이트 기사는 최대한 기자의 감정을 배제하고 수집된 정보를 유기적으로 나열하는 데에 그치기 때문에 그나마 객관성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경험담을 다룬다는 게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위건 부두로>도 빗겨갈 수 없다. 오웰은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는 젊은 여인과 눈이 마주치며 그에 대한 추론을 시작한다. ‘유산과 고역 때문에 스물다섯인데도 마흔이 돼 보이도록 지쳐 있었다.’더러운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지를, 내가 알 듯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라며 여인의 표정 하나를 보고 그의 인생 전반과 인생에 대한 그의 생각까지 확대해석한다. 사실 젊은 여인은 꼬챙이로 배수관을 찌르며 그날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멍때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오웰은 슬럼가의 젊은 여자들의 비참하고 빈곤한 삶을 젊은 여인에 투영하고 싶었겠지만, 오웰의 이러한 시각은 슬럼가의 하층 계급을 무의식적으로 불쌍한 존재로 봐야 한다고 독자에게도 주문하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움이 필요한 객체로 인식하게 한다. 어찌 되었든 오웰은 자신의 경험을 확대해석하는 경향을 띠기도 했지만, 반즐리의 여러 집들을 살펴본 뒤 가스관이나 외벽의 상태, 방의 개수, 집 유지비용 등의 객관적인 정보들을 자세히 메모하고 나름 논리적으로 지역의 주택 문제를 이끌어내는 식의 논조도 해냈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는 암보다는 명이 더 많다.

 

변하지 않는 빈곤의 형태

<위건 부두로>1937년에 쓰여진 책이지만 지금의 시대와도 통용되는 부분이 많다.

 

그들은 일을 하도록 길러졌다가, 이제 다시는 일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아져 난감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업은 ‘개인’에게 닥친 재앙이었으며, 그것은 당신 ‘자신’ 탓이었던 것이다.

 

포스트포디즘 시대는 사실상 2008년에 끝났지만, 그 시대가 남긴 취업난은 사회의 고질병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한국도 20대의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지만 높아진 고급 인력 비율과 반비례하게 그들이 설 수 있는 취업 시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청년의 실업률은 이력 현상을 보이며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독립변수에 의한 타격을 가장 많이 받는다. 하지만 청년들은 자신이 취업이 안되는 이유는 다른 이들보다 스펙이 부족해서,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자기 관리를 하며 능력주의 사회에 순응한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임금을 받는 것이 최대의 공정함이라고 생각하는 요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정이라는 개념이 통용되고 생겨나지도 않았던 37년도의 노동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여생을 실업수당에 의존하며 살기로 한 사람들이 생필품보다 사치품을 소비하는 것은 지금 시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어떻게든 해내려 발악하는 모습과 닮았다. 당시에 사람들은 도박 당첨금에 1페니를 걸어봄으로써 며칠간의 희망을 산다. 현대의 사람들은 복권을 긁으며 다음 주 토요일까지 자신이 복권에 당첨되는 행복 회로를 가동하며 일주일을 산다. SNS에서 복권 당첨자들의 사례를 접하며 나도 814만분의 1의 확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위로하며 그들은 또 일주일을 산다. 이것은 당시의 영국 북부의 노동자를 보며 우리는 당시의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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