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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책 리뷰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이도우

by 조창대 2021.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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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인문학 서적을 자주 보고 소설은 관심 없었는데 무슨 기우 때문인지 집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걸 보고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처음 읽을 때만 킬링타임이지 이야기를 계속 읽고 있노라면 지루해지고 꾸준히 완주할거란 의지가 없어서 항상 읽다 말았다. 그리고 같은 장을 읽는다면 소설보다는 생각하거나 얻을 게 많은 인문학 책을 읽고 말지라는 ..그런 경향이 있다.

어쨌든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킬링타임용으로 읽다가 몰입이 되어서 431페이지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있으면 풍경 묘사를 마치 그림을 보며 집필을 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책에 등장하는 북현리같은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체감하기는 좀 힘들었다.
하지만 작가가 장면묘사나 인물의 옷차림, 표정, 몸짓 등을 생생하게 표현하려 하는 게 보여서 나도 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풍경과 인물, 상황 묘사를 세세히 하려면 당연히 어휘의 폭도 넓어야 한다. 역시 작가답게 사용하는 어휘가 다양하고 고급지다. 읽다가 알게 되는 말이나 단어는 메모하곤 했었는데, 이건 꼭 기억해야겠다 하는 단어는 ‘윤슬’이었다.

 

“참, 그 낱말이 뭔지 혹시 알아? 물결에 햇빛이 비쳐서 반짝반짝 빛나는 현상.”
“알지.”
그러고는 대답이 없어서 해원은 다시 말했다.
“알면 말해줘야지.”
“말해줘도 너 또 잊어버릴 거잖아.”
“애개— 내가 왜!”
그가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윤슬, 이라고 해.”


주인공인 해원과 은섭의 대화 속에서 ‘윤슬’이라는 단어와 그 뜻이 나온다. 은섭은 북현리의 작은 마을에서 ‘굿나잇 책방’이라는 작은 서점을 운영한다. 동시에 굿나잇 책방 블로그에 책방 일지를 쓰며 그날의 입고 서적, 자신의 일상 등을 공유하는 인물이다. 은섭은 해원을 H라고 칭하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느꼈던 감정 따위를 혼잣말하듯이 털어놓기도 했다. 이 인물을 내 시선에서 표현하자면.. 문학적, 교양적, 감성적, 순박함, 배려, 평온함, 잔잔한 물결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은섭이 잔잔한 물결이라면 해원은 그 위에 내려앉은 윤슬이다. 해원은 서울 생활에 대한 도피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겨울이 지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해원은 은섭에게 있어서 일시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존재, 깨고 싶지 않은 꿈, 기적 같은 존재였다. 윤슬도 햇빛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물결에 비쳐져 반짝거리는 때는 마음 속에 깊이 담고 싶은 찬란한 장면이다. 은섭에게 해원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


비유도 탁월하다. 읽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장들이 마음에 깊숙히 박힐 때가 있었다.

그의 사랑은… 눈송이 같을 거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고. 그만두려면 지금 그래야 한다 싶었지만 그의 외로워 보이는 눈빛에서 피할 수가 없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은섭은 잔잔한 사람이라 사랑도 잔잔하게 한다. 나는 눈송이 같은 사랑이 좋다. 요란하게 와서 훌쩍 떠나버리는 사랑보단 한결같이 잔잔하고 함께 한 추억이 계속 쌓여가는 사랑이 최고인 것 같다.


봄이 오고 벚꽃이 피었다 지고, 산길에 라일락과 아카시아 향기가 코를 찌를 때도 우리는 그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불을 때고 밥을 지어 먹으며 숨어 있겠지. 책방? 알 게 뭐야. 사랑하는데 책 따위가 필요할 리 없잖아.


은섭이 사랑꾼~~~

인물들의 화법


작가의 어휘력과 표현력이 굉장했지만 또 한편으론 인물들의 대화가 오글거리기도 했다. 글자보단 영상을 더 많이 접하는 현재 20대의 갬성에서는 쓰지 않는 말들이라 그런지 위화감을 느꼈다.

“그럴리가. 모든 첫사랑은 과거완료야.”
“너무 오래 못 봤던 건가! 식어버리고 만 거야?”


이런 멘트들. 은섭과 해원이 참석한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장우라는 친구가 은섭의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 상대를 묻자 자신은 목해원이라고 대답한 상황이었다. 실제 상황이었고 내가 만약 해원이었다면 저 ‘첫사랑은 과거완료’ 대목에서 정이 훅 털렸을 것 같다. 이건 누가 해도 커버 불가능. 그 아래 친구의 반응도 뮤지컬 말투라 생각돼서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나보다.

 

 

근데 요즘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말을 시니컬하게 줄이는 경향이 있어서 문학 작품을 보며 오글거리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생각한다. ‘첫사랑은 과거완료’라고 했을 땐 분명 ‘진지충’이라는 공격을 받을 게 뻔한데 이런 풍부한 감정 표현에 인색한 요즘 문화가 잘못된 점도 있는 것 같아서 슬펐다.


내 얘길 해볼까? 나는 약 더미 속에서 자랐지
약 위로 미끄럼틀 타고 약상자로 말을 탔지
난 매일매일 보았어. 약 없으면 못 사는 사람들
회복제 먹고 피곤하게 일해. 안정제 먹고 불안하게 살아
삼권분립은 전사 법사 힐러— 약 파는 우리 엄마도 혜천로터리 힐러—
일단 한 병 마시고 시작해 드링크제 강장제, huh—?
먹은 데다 또 먹어, 바른 데다 또 발라
낫지도 않는데 무슨 소용, 나을 때까지 복용 또 복용
이젠 점검해봐 너의 나약한 정신 상태, huh—?


이건 굿나잇 책방 스터디 회원인 중학생 현지의 자작랩인데 소소한 웃음거리였다.
작가님 쇼미더머니 나가면 어떠실지.

눈물차 이야기


 

주인공 부엉이는 슬픈 생각을 떠올리며 흘린 눈물을 찻주전자에 모아 따뜻한 눈물차를 끓여 마시곤 했는데, 그러고 나면 슬픔이 조금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도 눈물차를 끓여 마실까?”

“꼭 울지 않아도 괜찮아. 슬픈 생각을 주전자에 담는 척하면 돼. 어때?”

“…좋아요.”

“나부터 떠올려볼게… 망쳐버린 그림들.”

“네 차례야.”

“…망가진 자전거.”

“옛날에 살던 집.”

“캄보디아.”

“상한 줄 모르고 마신 우유.”

“급식 반찬에 나온 벌레.”


눈물차 부분이 이 소설에서 가장 문학적인 대목이다. 슬픈 감정을 단순히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차를 끓이듯이 성숙하게 승화시켜서 받아들인다는 내용 같았다. 슬픈 감정도 나의 감정의 일부이니 외면하지 말고 성숙하게 받아들이자.


책 제목의 의미



책을 읽으면서 왜 제목이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인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책 제목은 그 책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책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투영하는 곳 아닌가. 완주하고도 제목의 의미가 애매모호했다.
해원과 학창시절 단짝이었지만 지금은 멀어진 보영이한테 연락이 오자, 해원은 “다음에. 다음에 날씨 좋을 때 보자.”며 만남을 거절한다. 날씨가 안 좋다고 못 볼 건 없다. 만나고 싶으면 폭설이 와도 만난다. 내 남자친구랑 책 이야기를 하다가 제목을 말해주니 “별로 사랑하지 않나 보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간다니.”라고 답했다. 명료하고 명쾌했다. 지금은 만날 마음이 없으니 나중에 언젠가는 보자라는 형식적인 말이다.

 


해원은 소설 대부분에서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강사 일이 힘에 부쳐서 고향으로 내려오고, 보영이와 화해하는 자리에서 벽을 두고, 이모와의 갈등에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또 서울로 올라갔다. 해원의 이런 성격과 제목이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작가님은 작가의 말에서 ‘다음에 날씨 좋을 때 만나요’ 따위의 말들은 무해무익하고 공허할지도 모를 안부인사지만 싫지 않다고 언급했다. 흠.. 난 쓸 데 없는 말을 안 하는 편이라 공감이 안 되긴 한다.
하지만 후반부쯤엔 해원이 보영과 화해하고 봄이 될 무렵에 북현리로 다시 내려오면서 가족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려 한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해원이 한 단계 성장했다고 보아도 되겠지? 아니면 해원이 떠나더라도 결국엔 다시 은섭과 가족의 곁으로 돌아올거란 암시이기도 하고.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 선하고 순수해서 배경으로 나오는 눈 덮힌 북현리와 잘 어울린다.
악한 인물이 없어도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았다. 다 작가님의 세밀한 묘사, 이야기 구성력 덕분이겠지.
드라마로도 리메이크 됐던데 보고 싶다가도 과연 소설처럼 인물의 모습이나 감정을 세밀하게 묘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 보기로 결정.. 암튼 보는 내내 힐링이고 행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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